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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도적 떼 / Die Räuber


지은이 : 프리드리히 폰 길러 / riedrich von Schiller

옮긴이 : 김인순

출판사 : 열린책들

페이지 : B6 견장정 / 256 면




18세기 후반 독일 문단을 휩쓴 문학 운동인 <질풍 노도>의 대표작.

프리드리히 폰 실러는 평생 문학을 통해 <자유>의 이념을 추구한 <자유의 시인>, <자유의 선구자>로 불린다. 사회의 모든 억압과 질곡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 자유의 이상을 구현하고 널리 알리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실러의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도적 떼』는 당시 아주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으로서, 이런 <자유>의 이념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포하였다. 1782년 1월 13일 만하임의 국립 극장에서 「도적 떼」가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관객들은 그야말로 열광과 환호로 답하였다고 전해진다. <극장 안은 마치 정신 병원 같았다. 관객들은 눈알을 구르고 주먹을 굳게 쥐고 목쉰 소리로 크게 외쳤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둥켜안았고, 여인들은 쓰러질 듯 비틀비틀 문을 향해 걸었다. 혼돈의 안개 속에서 세상이 처음 창조되던 때처럼, 모든 것이 해체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도적 떼」에 열광하였으며, 일부 젊은이들은 남독일에서 자유를 찾아 직접 도적단을 결성하는 사태까지 빚었다고 한다. 「도적 떼」는 만하임의 초연 이후, 함부르크에서 라이프치히에 이르기까지 독일 각지에서 무대에 올랐으며, 1792년에는 파리에서 상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이 성공에 힘입어, 실러는 프랑스 혁명 정부에 의해 프랑스 명예시민으로 추대된다.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은 물론 당시의 시대적·사회적인 상황과 깊게 맞물려 있다. 당시는 절대주의 왕정 치하에서 시민사회와 프랑스 혁명으로 넘어가는 격변의 시대였다. 시민 계급은 기존 사회 체제의 멍에에 눌려 정치적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는 지나치게 이성을 강조하고 감정을 무시하던 계몽주의 경향의 사회 풍조에 짓눌려 있었다.

그러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문학이 시민적인 자의식의 표출 수단으로서 크게 부각되었다. 특히 1765년에서 1785년 사이, 괴테를 비롯한 시민 계급 출신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일 문단을 휩쓴 문학 운동 〈질풍노도Sturm und Drang〉는 당시의 사회에 대한 문학적인 항의와 반항의 표출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감정의 발산을 예찬하고, 사회적인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 천재적인 개성을 찬미하며, 기존의 세계 질서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추구하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실러의 「도적 떼」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후자가 사회적 인습과 이성의 굴레에 억눌린 감정의 자유로운 해방을 부르짖었다면, 전자는 정치적 억압과 폭정에 대항하여 반란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도적 떼」는 당시 무명의 실러 작품을 출판하려는 출판사가 없었기 때문에, 1781년에 익명으로 자비 출판되었다. 그리고 일 년 후, 우여곡절 끝에 만하임에서 초연되어 센세이셔널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실러는 허가받지 않고서 만하임에 여행했다는 이유로, 당시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영주 카를 오이겐 공작에게서 이 주일의 금고형과 저술 금지령을 선고받는다. 실러는 자유롭게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기를 바라며 국경을 넘어 만하임으로 도망친다. 이후 경제적인 곤란과 질병 등 많은 역경과 싸우며 파란만장한 삶을 헤쳐 나간다.

그러나 1784년 『라이니셰 탈리아』에 〈나는 그 어떤 제후도 섬기지 않는 세계시민으로서 글을 쓴다〉라고 밝혔듯이, 말년의 대표작 「발렌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향한 실러의 열정은 평생 한시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도적 떼」에서 실러는 특히 〈형제의 반목〉이라는 모티프를 이용하여 자유와 반항을 더욱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두 형제 카를과 프란츠는 카인과 아벨처럼 서로 판이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카를은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열광하고 열정과 의욕에 넘치는 활동가이면서, 자유와 정의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이다.

그는 봉건 제도의 폭정과 사회적인 불의에 맞써 싸우고 억압받는 자들을 도와주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도적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아서,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하에 많은 선량한 양민들이 학살당한다. 과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카를은 인류의 이 영원한 이율배반 앞에서 깊은 내적인 갈등에 휘말리며, 잔학한 만행과 무법으로는 세상을 결코 아름답게 만들 수 없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동생 프란츠는 냉정하게 계산하는 이기적인 합리주의자이고, 정열의 감성 세계를 부인하는 유물론자이며, 절대주의의 폭군을 대표하는 냉혹한 지배자이다. 실러는 자연의 혜택도 입지 못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한 프란츠의 독백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환경에 지배당하고 또 계산이나 합리적인 것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지 실감나게 펼쳐 보이면서 악인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절실하게 그려 낸다.

카를과 프란츠는 당시의 세계 질서와 주어진 운명에 각자의 방식으로 반항한다. 카를은 사회적 불의와 정치적 억압에 맞서 투쟁하며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려 드는 반면, 프란츠는 책략과 술수의 악의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 모두 실패한다. 여기에서 실러는 상황에 몰리고 양심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프란츠와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서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결심하는 카를을 대비시켜 진정으로 자유로운 불멸의 인간상을 보여 준다. 카를은 모든 불의와 핍박에 대항하여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의 운명을 끝까지 자유 의지로 결정하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실러는 카를을 가리켜, 무절제한 열정에 휩싸여 많은 만행을 저지르며 심연 깊숙이 추락하지만, 깊은 절망과 불행을 딛고 일어서서 다시 고매한 천성을 되찾는 〈방황하는 위대한 영혼〉이라고 말한다.

스무 살 혈기왕성한 젊은 실러의 자유를 향한 강렬한 열정과 힘찬 기개는 「도적 떼」의 형식과 언어에도 그대로 표출된다. 실러는 고전 드라마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삼일치 원칙 같은 문학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드라마의 형식을 전개한다. 또한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욕설과 거친 표현을 풍성하게 섞어 가며 박진감 넘치는 힘찬 언어로 독자들을 「도적 떼」의 세계 깊숙이 빨아들인다.

실러는 결코 길지 않은 이 한 편의 비극에 자유의 이념과 더불어, 질서를 추구하는 법과 개인의 갈등, 인도주의 정신, 정의와 불의, 간계와 오해, 사랑과 폭력, 형제 반목, 부자 갈등, 남녀의 지순한 사랑 등 인류의 영원한 과제이며 수수께끼인 주요한 테마들을 더없이 절절하고 생생하게 엮어 넣었다. 등장인물들의 분명한 성격과 정곡을 찌르는 대사,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오한 인식, 작품을 꿰뚫고 흐르는 강렬한 언어의 힘은 이백 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공감을 자아내며 인도주의 정신과 자유의 이상을 일깨운다.


지은이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

1759년 독일 마르바흐에서 태어났다. 라틴어 학교에 다니면서 희곡을 쓰기 시작했으며, 1773년 사관학교에 입학해 법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재학 시절부터 집필한 『도적 떼』를 1780년에 완성하여 만하임 국립 극장에서 초연함으로써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허가받지 않고 「도적 떼」 관람차 만하임으로 여행했다는 이유로 금고형과 저술 금지령을 선고받았다. 실러는 만하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오게르스하임 등지로 도피했다가 1783년 만하임으로 돌아가 「간계와 사랑」을 탈고했다. 그때부터 1785년까지 만하임 극장의 전속 작가로 활동했다. 1788년에 예나 대학 역사학과의 무급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1805년 결핵에 의한 급설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풍자시 「크세니엔」등과 「빌헬름 텔」등의 작품을 남겼다.

「도적 떼」는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으로, 정치적 억압과 폭정에 대항하여 반란의 깃발을 높이 들면서 〈자유〉의 이념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포하였다. 18세기 후반 독일 문학은 시민의 성숙한 자의식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크게 부각되던 상황이어서 「도적 떼」가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도적 떼」는 초연 이후 독일 각지에서 무대에 올랐으며, 1792년에는 파리에서 상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이 성공에 힘입어, 실러는 프랑스 혁명 정부에 의해 프랑스 명예시민으로 추대된다. 대표 작품으로는 희곡「도적 떼」(1780), 「피에스코의 모반」(1782), 「간계와 사랑」(1783), 「돈 카를로스」(1787), 「발렌슈타인」(1796), 「마리아 슈투아르트」(1800), 「오를레앙의 처녀」(1801), 「메시나의 신부」(1803), 「빌헬름 텔」(1804) 외에도 「잠수부」, 「장갑」, 「이비쿠스의 두루미」등 주옥같은 담시와 시, 송가를 남겼다. 실러는 시인, 극작가, 철학자, 역사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괴테와 더불어 독일 언어 예술의 황금시대라 일컬어지는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현재까지도 독일의 가장 중요한 극작가로 평가받으며, 그의 희곡들은 독일 극장의 기본 레퍼토리를 이룬다.


옮긴이 김인순

고려대학교 독어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칼스루에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고려대학교 대학원 독어독문과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은 뒤 현재 함부르크에서 연구를 계속학 있다. 논문으로 「로베르트 무질 소설에 있어서 비유의 기능」 등 다수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클라우스 바겐바흐의 『카프카의 프라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법』,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아』등이 있다.